키보드 이야기에는 색깔 이름이 끝없이 나온다. 적축이 무난하다더라, 청축은 시끄럽다더라, 은축은 빠르다더라. 색깔로 성격을 말하는 이 관습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암호처럼 들린다. 빨간 스위치와 갈색 스위치가 무슨 상관인지 알 길이 없다.
답은 단순하다. 스위치 안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부품, 그러니까 축의 플라스틱 색깔이 그대로 이름이 된 것이다. 왜 하필 그 색인가에는 대단한 이유가 없다. 종류를 구분하려고 다른 색으로 찍었을 뿐이다. 다만 그 색이 오래 쓰이면서 성격의 이름표가 되었다.
색이 이름이 된 내력
기계식 스위치를 널리 퍼뜨린 회사가 자기 제품을 갈래별로 다른 색 축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걸림 없이 미끄러지는 것은 빨강, 중간에 걸림이 있는 것은 갈색, 걸림에 소리까지 더한 것은 파랑.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적축, 갈축, 청축이라 불렀다.
그 회사의 특허가 풀리자 여러 회사가 같은 규격의 스위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로 만드는 쪽에서도 성격이 비슷하면 비슷한 색을 썼다. 소비자가 색만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편했다. 그렇게 색 이름은 한 회사의 제품명을 넘어 갈래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자주 보이는 색들
빨강은 리니어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림이 없고 가벼운 편이다. 무난하다는 평을 가장 많이 듣는 자리에 있다.
갈색은 택타일이다. 누르는 중간에 작은 턱을 넘는 느낌이 손끝에 온다. 소리는 크지 않으면서 눌린 것은 알 수 있어서, 사무실에서 쓰기 좋은 절충으로 꼽힌다.
파랑은 클릭이다. 걸림에 더해 딸깍 소리가 난다. 치는 맛이 가장 분명하지만 옆자리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한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면 권하기 어렵다.
검정은 무거운 리니어다. 빨강과 성격은 같은데 힘이 더 든다. 손힘이 센 사람이나, 가벼운 축에서 자꾸 헛디디는 사람이 찾는다.
은색은 리니어인데 눌리는 깊이가 얕다. 조금만 내려가도 입력되니 반응이 빠르다. 빠른 조작이 중요한 게임에서 선호되는 편이고, 대신 글을 칠 때는 스치기만 해도 들어가 오타가 늘 수 있다.
색을 너무 믿지는 말 것
색 이름은 편리한 지도지만 정밀한 지도는 아니다. 만드는 회사마다 같은 색에 다른 성격을 담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의 갈축은 걸림이 또렷한데 다른 회사의 갈축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어떤 적축은 가볍고 어떤 적축은 제법 묵직하다. 색은 갈래를 알려 줄 뿐, 그 안의 세밀한 차이까지 담지 못한다.
요즘은 색 이름을 아예 쓰지 않는 스위치도 많다. 회사마다 저마다의 이름을 붙이고, 색은 예쁘게 뽑아 놓는다. 이럴 때는 색을 보지 말고 설명에 적힌 갈래와 키압, 눌리는 깊이를 읽는 편이 정확하다.
같은 색이어도 갈라지는 것들
색이 같고 갈래가 같아도 손끝의 인상이 갈리는 이유는 또 있다. 스위치를 이루는 플라스틱이 무엇이냐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어떤 재질은 부딪힐 때 맑고 높은 소리를 내고, 어떤 재질은 낮고 둔탁한 소리를 낸다. 요즘 스위치들이 위아래 껍데기에 서로 다른 재질을 섞어 쓰는 것은 이 소리를 다듬으려는 것이다.
윤활이 되어 있는지도 크게 작용한다. 공장에서 기름을 발라 내놓는 스위치는 같은 갈래라도 훨씬 매끄럽고 잡소리가 적다. 윤활이 없는 스위치는 축이 껍데기에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값이 비슷한 두 스위치를 놓고 하나는 부드럽다 하고 하나는 거칠다 하는 평이 갈릴 때, 원인은 대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색은 첫 번째 갈래만 알려 준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다음은 재질과 윤활과 스프링이 결정하고, 그 셋은 색깔에 적혀 있지 않다.
결국 물어야 할 세 가지
색 이름 뒤에 있는 진짜 정보는 셋으로 정리된다. 걸림이 있는지, 얼마나 무거운지, 얼마나 깊이 눌러야 하는지. 이 셋을 알면 색은 몰라도 그 스위치가 어떤 물건인지 짐작할 수 있다.
색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셋을 한 단어로 줄여 부르는 오래된 약속이다. 편하니까 계속 쓰이고, 대충 맞으니까 계속 통한다. 다만 진짜 내 손에 맞는 것을 고르는 순간에는 약속어 뒤에 있는 세 가지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적축이 무난하다는 말은 대체로 옳지만, 그 무난함이 내 손에도 무난하다는 보장은 아무도 해 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