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를 알아보다 보면 어느 순간 무접점이라는 말과 마주친다. 값이 제법 나가고,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른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름부터 아리송하다. 접점이 없다니, 그러면 어떻게 눌린 것을 아는가.
무접점은 접점이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금속끼리 부딪혀 붙는 접점이 없다는 뜻이다. 이 차이가 손끝의 감각과 키보드의 수명 양쪽을 바꿔 놓는다.
보통은 금속이 맞닿는다
흔한 기계식 스위치는 안에 얇은 금속 조각 둘이 들어 있다. 키를 누르면 축이 내려가면서 한쪽 조각을 밀고, 둘이 맞닿는 순간 전기가 흘러 글자가 입력된다. 손을 떼면 조각이 제자리로 돌아가 떨어진다. 단순하고 확실한 구조다.
다만 금속이 부딪히는 일이라 흠이 따라온다. 수백만 번 부딪히면 닿는 자리가 닳고, 먼지나 습기가 끼면 접촉이 나빠진다. 오래된 키보드에서 한 글자가 두 번씩 찍히는 증상이 이것이다. 붙었다 떨어지는 찰나에 조각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여러 번 닿았다 말았다 하는 현상인데, 대개는 회로가 걸러 주지만 접점이 낡으면 걸러지지 않고 새어 나온다.
닿지 않고 알아채는 법
무접점 방식은 금속을 맞대는 대신 거리의 변화를 읽는다. 키 아래에는 고깔 모양의 고무가 있고, 그 안쪽에 원뿔처럼 감긴 용수철이 들어 있다. 키를 누르면 고무가 찌그러지며 용수철이 기판 쪽으로 가까워진다. 기판은 이 용수철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를 전기적으로 감지한다. 가까워질수록 값이 커지고, 정해진 문턱을 넘으면 눌린 것으로 판단한다.
닿지 않으니 닳을 자리가 없다. 접점이 산화되어 접촉이 나빠질 일도, 채터링이 생길 일도 구조적으로 적다. 무접점 키보드가 유난히 오래간다는 평을 듣는 이유다.
손끝의 느낌도 다르다. 고무가 찌그러지는 힘과 용수철이 밀어 올리는 힘이 겹쳐서, 처음에는 부드럽게 들어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스르르 풀리듯 내려간다. 걸림이라기보다 미끄러짐에 가깝고, 소리는 낮고 둔탁하다. 이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것으로 돌아가기 어렵다고 말한다. 반대로 물컹하다며 맞지 않아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값이 비싼 이유
무접점 키보드는 대개 값이 세다. 만드는 회사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기판과 부품이 그 방식에 맞춰 따로 설계되기 때문이다. 흔한 기계식처럼 여러 회사가 부품을 나눠 만들고 서로 갈아 끼우는 생태계가 아니다.
같은 이유로 손볼 여지도 좁다. 스위치를 뽑아 다른 축으로 바꾸는 일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고, 키캡도 아무거나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축을 고정하는 기둥이 열십자가 아니라 다른 모양인 제품이 있어서, 사려는 키캡이 그 모양을 지원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바꿔 말하면 취향을 탐색하는 물건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취향에 답하는 물건에 가깝다. 무엇이 좋은지 아직 모르겠다면 핫스왑 키보드로 여러 축을 겪어 보는 편이 낫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감각이 좋다는 확신이 섰다면 그때 넘어가도 늦지 않다.
고무 돔 키보드와는 다르다
무접점 키보드 안에 고무가 들어간다는 말을 들으면, 사무실에 흔한 값싼 키보드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 키보드들도 고무 돔을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접점을 두고 결국 고무 키보드 아니냐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겉모습은 닮았어도 속은 다르다.
값싼 고무 돔 키보드는 고무가 찌그러질 때 고무 안쪽에 발린 검은 면이 아래 회로판을 직접 눌러 접촉시킨다. 고무가 스위치 노릇까지 겸하는 셈이다. 고무는 쓸수록 늘어지고, 늘어지면 눌리는 느낌이 흐물흐물해지며 반응도 둔해진다. 몇 해 쓴 키보드가 물러지는 이유다.
무접점에서 고무는 접촉을 만들지 않는다. 손끝을 되밀어 주는 역할과 용수철을 눌러 내리는 역할만 한다. 입력을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판이 읽는 거리다. 고무가 조금 늘어져도 문턱을 넘기만 하면 입력은 또렷하게 들어간다. 같은 재료를 쓰면서도 수명과 감각이 갈리는 자리가 여기다.
정전용량이라는 말
무접점 키보드를 설명할 때 정전용량이라는 말이 함께 나온다. 두 금속이 가까워질수록 전기를 품는 양이 늘어난다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접점 방식은 이 성질을 이용해 거리를 읽는다. 용수철이 기판에 가까워지면 품는 양이 늘고, 그 늘어난 정도를 회로가 읽어 눌림을 판단한다.
이 방식에는 재미있는 여지가 있다. 접점이 붙었느냐 떨어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가까워졌느냐를 읽으니, 문턱을 어디에 둘지 정할 수 있다. 살짝만 눌러도 입력되게 하거나, 깊이 눌러야만 들어가게 조절하는 제품이 나오는 것은 이 덕분이다. 얕게 두면 반응이 빨라지고 깊게 두면 헛디딤이 준다. 손에 맞는 깊이를 직접 정한다는 것은, 스위치를 갈아 끼우는 일과는 또 다른 방식의 맞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