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키보드를 들이고 며칠쯤 지나면 이상한 것이 귀에 걸리기 시작한다. 글자 키들은 고르게 통통 소리를 내는데, 스페이스바와 엔터와 시프트만 유독 다르다. 덜그럭거리거나, 챙 하고 금속성 소리가 섞이거나, 한쪽을 누르면 반대쪽이 들썩인다. 나머지가 멀쩡하니 더 도드라진다.
원인은 대개 스위치가 아니라 그 옆에 숨어 있는 부품이다. 스테빌라이저, 우리말로 옮기면 안정기라 부르는 물건이다.
큰 키에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글자 키는 작고 네모나서 가운데 있는 스위치 하나로 충분히 지탱된다. 어디를 눌러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다.
스페이스바는 다르다. 길이가 글자 키의 예닐곱 배나 되는데 스위치는 여전히 가운데 하나뿐이다. 왼쪽 끝을 엄지로 누르면 그 힘이 가운데 축을 비틀고, 오른쪽 끝은 시소처럼 들린다. 이대로 두면 끝을 누를 때마다 키가 기울어져 제대로 눌리지 않는다. 엔터와 시프트와 백스페이스도 정도만 다를 뿐 같은 처지다.
스테빌라이저는 이 기울어짐을 막는다. 키캡 아래 양쪽 끝에 작은 다리를 하나씩 세우고, 그 둘을 철사로 이어 둔다. 한쪽이 내려가면 철사가 비틀리며 반대쪽도 함께 내려간다. 어디를 누르든 키가 평평하게 내려가는 것은 이 철사 덕분이다.
잡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문제는 이 구조가 소리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철사는 플라스틱 집 안에서 움직이는데, 그 사이에 틈이 있으면 키를 누를 때마다 철사가 벽에 부딪힌다. 이것이 덜그럭 소리의 정체다. 철사가 길수록 흔들림이 커지니, 스페이스바가 가장 심하게 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하나는 철사와 플라스틱이 스치는 소리다. 마른 채로 비벼지면 삐걱거리거나 챙 하는 쇳소리가 난다. 스테빌라이저가 잘 잡힌 키보드와 그렇지 않은 키보드의 인상 차이는 대부분 이 두 소리에서 갈린다. 스위치를 아무리 좋은 것으로 바꿔도 여기를 손보지 않으면 큰 키만 계속 다른 소리를 낸다.
손보는 세 가지
가장 효과가 큰 것은 윤활이다. 철사가 플라스틱에 닿는 자리와 다리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자리에 되직한 기름을 얇게 바른다. 스치는 소리가 사라지고 움직임이 부드러워진다. 너무 많이 바르면 눌리는 느낌이 눅눅해지니 얇게 펴 바르는 것이 요령이다.
다음은 흔들림 줄이기다. 철사와 다리 사이에 틈이 있으면 그 틈만큼 덜걱인다. 이 틈을 메우는 방법이 여러 가지 알려져 있는데, 얇은 테이프를 감거나 되직한 기름을 채워 넣는 식이다. 틈이 사라지면 덜그럭 소리도 함께 사라진다.
마지막은 바닥에 무엇을 대는 일이다. 스테빌라이저의 다리가 내려가 기판을 때리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 자리에 얇은 반창고 조각을 붙여 두면 때리는 소리가 부드러워진다. 오래전부터 널리 쓰인 방법이라 이름까지 붙어 있다.
끼우는 방식도 다르다
스테빌라이저는 기판에 나사로 조이는 것과 기판에 딸깍 끼우는 것, 그리고 플레이트에 끼우는 것으로 나뉜다. 나사로 조이는 쪽이 가장 단단하게 고정되어 잡소리가 적고, 끼우는 쪽은 조립이 간편한 대신 흔들릴 여지가 조금 더 있다.
플레이트에 끼우는 방식은 스위치를 붙드는 철판에 스테빌라이저를 함께 매다는 구조다. 완제품 키보드에서 흔히 쓰이는데, 손보려면 스위치를 뽑고 플레이트를 들어내야 해서 접근이 번거롭다.
스위치 탓인지 안정기 탓인지
소리가 거슬리는데 원인이 어디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글자 키를 여러 개 눌러 보고, 그다음 스페이스바와 엔터와 시프트를 눌러 본다. 큰 키에서만 다른 소리가 난다면 안정기가 원인이다. 온 자판이 고르게 거슬린다면 스위치나 케이스 쪽을 봐야 한다.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은 눌리는 자리다. 큰 키의 한가운데를 눌렀을 때는 멀쩡한데 끝을 눌렀을 때만 덜걱인다면 거의 틀림없이 안정기다. 끝을 누를 때 철사가 가장 크게 비틀리기 때문이다.
키캡을 뽑아 보면 더 분명해진다. 키캡을 벗긴 채로 안정기의 다리를 손끝으로 눌러 보면, 잡소리가 나는 자리가 어디인지 귀로 직접 짚을 수 있다.
여기부터 손보면 된다
키보드 소리를 다듬어 보고 싶은데 어디서 시작할지 모르겠다면 스테빌라이저가 첫 자리로 알맞다. 손봐야 할 곳이 네댓 군데뿐인데 귀에 들어오는 변화는 가장 크기 때문이다. 스위치 백 개를 윤활하는 일은 반나절이 걸리지만, 스테빌라이저는 삼십 분이면 끝난다.
그리고 이 작업은 한번 해 두면 오래간다. 덜걱임이 사라진 스페이스바는 나머지 키들과 같은 목소리로 울고, 그제야 키보드 소리가 하나로 들리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