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닥타닥타닥, 한 글자씩
키보드

각인이 지워지는 키보드, 안 지워지는 키보드

타닥 읽을거리 · 2026-08-27

몇 해 쓴 키보드를 들여다보면 어떤 글자는 흐려져 있다. 자주 누르는 자리부터 먼저 사라지고, 결국 손끝이 기억하는 자리만 남는다. 반대로 십 년을 써도 처음과 똑같이 또렷한 키보드도 있다.

같은 플라스틱에 같은 글자를 새긴 것 같은데 어째서 이렇게 갈리는가. 답은 글자를 어떻게 넣었느냐에 있다. 각인 방식이라 부르는 것이고, 방식마다 수명이 다르다.

표면에 얹은 글자

가장 값싸고 흔한 방식은 완성된 키캡 표면에 글자를 인쇄하는 것이다. 물감을 얹듯 찍어 놓는 셈이라 만들기 쉽고 색도 자유롭다. 문제는 그 글자가 표면 위에 있다는 점이다. 손가락이 하루에 수천 번 문지르면 조금씩 벗겨진다. 흔히 말하는 각인이 날아간다는 현상이다.

이 위에 얇은 보호막을 씌워 수명을 늘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매끈하고 반질거리는데, 그 막도 결국 닳는다. 막이 벗겨지기 시작하면 그 자리만 오히려 지저분해 보인다.

레이저로 태워 새기는 방식도 있다. 표면을 살짝 그을리거나 파내어 글자를 만든다. 인쇄보다는 오래가지만 파인 홈에 손때가 끼면 지저분해지고, 색을 자유롭게 넣기 어려워 대개 한 가지 색으로만 나온다.

색이 통째로 다른 플라스틱

오래가는 방식은 아예 다른 접근을 한다. 글자 모양의 플라스틱과 몸통 플라스틱을 따로 찍어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이중사출이라 부른다.

키캡을 뒤집어 보면 이 방식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글자 모양이 안쪽까지 다른 색으로 관통해 있다. 글자가 표면에 얹힌 것이 아니라 키캡 전체를 꿰뚫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표면이 아무리 닳아도 글자는 남는다. 위에서 몇 밀리미터를 갈아 내도 같은 자리에 같은 글자가 나온다.

값이 더 나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두 번 찍어야 하고, 두 플라스틱이 어긋나지 않게 맞물려야 하며, 틀도 두 벌이 필요하다. 다만 한번 사 두면 키보드보다 오래 남는 경우가 많다.

염료를 스며들게 하는 법

또 하나 오래가는 방식은 염료를 열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열을 가하면 염료가 기체로 변해 플라스틱 표면 안으로 파고든다. 표면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안쪽으로 배어드는 것이라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 방식은 글자 모양이 자유롭고 색도 여러 겹 쓸 수 있어서, 이중사출로는 만들기 어려운 정교한 무늬를 넣을 수 있다. 대신 제약이 하나 있다. 염료가 배어드는 방식이라 바탕보다 어두운 색만 넣을 수 있다. 짙은 바탕에 밝은 글자를 넣는 일은 되지 않는다. 검은 키캡에 흰 글자가 필요한 자리라면 이중사출로 가야 한다.

글자가 없는 키캡

각인 이야기의 끝에는 각인을 아예 넣지 않는 선택이 있다. 아무 글자도 없는 민무늬 키캡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자판을 보지 않고 치는 사람에게 글자는 어차피 쓰이지 않는 장식이고, 없으면 자판이 훨씬 깔끔해 보인다.

물론 대가가 있다. 오랜만에 쓰는 기호나 기능 키를 찾을 때 손이 헤맨다. 한글과 영문이 함께 적힌 자판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그래서 글자 키만 민무늬로 두고 기능 키에는 각인을 남기는 절충도 흔하다.

한글 각인이라는 문제

우리에게는 고민이 하나 더 있다. 예쁜 키캡을 찾아도 한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좋은 키캡은 대개 바깥에서 만들어져 알파벳만 새겨 나온다.

방법은 몇 가지다. 하나는 한글이 찍힌 키캡 한 벌을 따로 구하는 것인데, 선택지가 좁고 값이 만만치 않다. 다른 하나는 알파벳 키캡을 그대로 쓰면서 한글 자리를 손이 기억하게 두는 것이다. 자판을 보지 않고 치는 사람이라면 실제로 불편이 크지 않다.

작은 스티커를 붙이는 방법도 있다. 값이 싸고 되돌리기 쉽지만, 손이 닿는 자리라 시간이 지나면 모서리가 들뜨고 결국 떨어진다. 옆면에 한글이 새겨진 키캡을 찾는 사람도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알파벳만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한글이 보이는 방식이다. 자판이 깔끔해 보이면서 필요할 때 확인할 수 있어 절충으로 삼을 만하다.

무엇을 고를 것인가

오래 쓸 생각이라면 이중사출이나 염료가 배어든 키캡이 안전하다. 값은 더 들지만 몇 해 뒤에 후회하지 않는다.

값을 아끼고 싶다면 인쇄 방식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다만 자주 쓰는 몇 개의 키부터 흐려질 것을 미리 알고 사는 편이 좋다. 어차피 이삼 년 뒤에 다른 키캡으로 바꿀 생각이라면 굳이 비싼 것을 살 이유도 없다.

닳아 가는 것을 흠으로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가장 많이 누른 자리부터 흐려지는 자판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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